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110) 베를린에서 온 작가 라인홀트 안데르트와 그의 가족 -남북의 경계에서 사라진 독일의 경계를 말한다
수정 : 2021-08-26 05:37:17
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110
베를린에서 온 작가 라인홀트 안데르트와 그의 가족
-남북의 경계에서 사라진 독일의 경계를 말한다
▲ 도라산역 입구에서 기념사진. 코로나로 출입이 통제되어 도라산역을 보지 못했다.
독일인 라인홀트 안데르트(Reinhold Andert, 1944년~ ). 그는 음악가이자 작가다. 통일 이전 동독을 투지 있게 살았다. 많은 작품 중 실각한 동독의 최고지도자 호네커를 만나고 펴낸 ‘몰락 이후, 호네커와의 대화’가 크게 주목을 받았다. 부인 사비네(Sabine Andert) 씨와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 그중 둘째 아들 발렌틴(Valentin Andert) 씨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한국인 이윤지 씨와 만나 결혼했다. 아들 부부는 현재 파주에 살고 있다. 동베를린에 머물던 안데르트 씨가 아들 내외와 손자들을 만나기 위해 최근 한국을 찾았다. 베를린장벽 지척에서 서독지역을 빤히 바라보며 살았던 그. 분단 독일의 경계를 살았던 그와 가족을 파주 남과 북의 경계인 민통선 마을에서 만났다.
▲ 출처Stiftung Berliner Mauer, 사진작가 Detlef Gallinge 베를린 1989년- 앞쪽은 베를린장벽 뒤에 보이는 건물이 안데르트 씨가 살던 동독의 아파트다.
“통일은 원하지 않았다.”
코로나 방역 4단계로 민통선 안내가 쉽지 않았다. 도라산 전망대는 물론이거니와 남북출입사무소, 도라산 역마저 건물 앞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해마루촌을 지나 통일촌에서 인공기와 태극기가 멀리 나란이 키 대결을 하는 풍경을 보고, 마을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통일촌 카페에서 그와 시간을 가졌다. 그에게 남북한 경계에 대한 인상부터 물었다. “풀이 많고, 공장이 없고,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옛 동서독의 느낌과 비슷했다. 다만 동서독은 1980년대 후반에 오면 1백만 명이 오고갈 만큼 교류가 많았다.”
그 역시 통일 이전 여러 차례 서독을 방문했다. 예술가 비자를 가지고 있어서 수시로 왕래가 가능했다. 가족행사는 언제나 허용됐고 서독인의 동독방문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교류가 독일의 통일을 앞당겼을까? 서독을 방문하며 가졌던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문제가 많아 보였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통일에 대한 생각은?
“통일은 원하지 않았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독일 통일이후의 갈등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그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불만 정도가 아니었나?
“동독의 변화를 바랐다. 하지만 자본에 흡수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 안데르트 씨가 통일촌 마을 박물관을 둘러보고 있다.
“독일은 합쳐진 것이 아니라 붙여진 것”
통일의 긍정성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생각은 비틀어졌다. 그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했다. 당시 동독의 생각은 일치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곧바로 남북한의 통일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남북한의 통일에도 신중하기를 바라는가?”
“즉시 그렇다고 충고하고 싶다. 문제점이 많다. 문제가 반복되지 않으면 좋겠다.”
이것이 그만의 독특한 신념인지 많은 독일인의 생각인지 궁금했다. 부인 사비네 씨가 거들고 나섰다. “독일은 합쳐진 것이 아니라 붙여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독일이 아니다.”
독일은 커지고 강해졌지만 나아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커졌지만 나아진 것은 아니다? 통일은 부유한 사람들 이야기일 뿐 개개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아들 발렌틴 씨는 보통의 동독사람과 서독사람의 속내를 이렇게 요약했다.
“내가 쓴 돈이 서독으로 가네. 내가 낸 세금이 동독으로 가네.”
동서독의 갈등은 경제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통일은 됐지만 여전히 출신을 따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한인지 북한인지 따져 묻는 사람이 있다. 독일에선 동독출신인지 서독출신인지를 구분하려 한다.” 며느리 이윤지 씨의 말이다.
▲ 본보 이재석 이사장이 안데르트씨 가족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간적인 것이 먼저다. 정치는 나중이다.”
안데르트 씨가 몇 년전에 판문점을 여행할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남한은 볼거리가 많고, 북한은 자원이 많다. 통일이 되면 우리가 그것을 가져올 수 있다.” 그 때 관광안내인이 했다는 이야기를 인용하며, 남북한도 독일의 상황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그의 생각은 분명했다. 자본으로 얻을 수 없는 것들, 새로운 국가, 인간적인 통일, 그것이 아니라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다만 한 가지 전제를 붙였다.
“인간적인 것이 먼저다. 정치는 나중이다. 만나야 한다. 독일은 통일이전에도 만날 수 있었다.”
동독과 서독, 시대의 경계를 살았던 노작가에게서 원하던 희망의 메시지는 들을 수 없었다. 더 힘든 과제로 돼 버렸다. 남북의 통일은 독일과 다를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남한과 북한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말 할 만큼 아는 것이 없다. 그리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 손님으로 왔으면 그 체제를 존중해야 한다.”
그는 시종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내친 김에 그의 내면을 더 확인하고 싶었다. 독일이 통일 되던 시기 한반도 남쪽에서 맑시즘을 통해 사회변화를 모색하던 진보적 청년들이 있었음을 소개했다. 먼 유럽에서 터져 나온 통일의 환호가 맑시즘의 실패로 받아들여지면서 좌절했던 일단의 젊은이들. 그는 뜻밖의 이야기라는 듯 되물었다. “당신도 칼 맑스를 좋아하나요?” 그리고 말을 이었다. “실패한 것은 맑스가 아니다. 그가 분석한 사회주의체제는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 동독의 국가원수 호네커를 인터뷰를 두 책
「몰락 이후, 호네커와의 대화」 책을 펴내
그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몰락한 최고지도자 호네커를 만나고 그와의 대화를 책으로 펴낸 이력과도 연결된다. 1990년 호네커는 권력은 커녕 신변의 안전을 위협 받는 상황에 처한다. 호네커의 딸과 이웃으로 지냈던 그는 몰락한 지도자의 처지를 우려했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다. 이 인연으로 1990년 「몰락, 호네커 반대심문(Der Sturz. Erich Honecker im Kreuzverhör, 1990)」을 출간한다. 이 책은 뒤에 안데르트 씨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담은 「몰락 이후, 호네커와의 대화(Nach dem Sturz. Gespräche mit Erich Honecker, 2001)」로 재출간된다. 이 두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엔 번역되지 않았다. 그는 호네커의 정치에 문제 있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라기보다는 의견이 달랐을 뿐이라고 했다. 작가는 자신의 책을 선물했다.
▲베를린 자택에서 손자 벤야민과 함께
▲2017년 파주 이웃들과 유럽여행 중 가족과 함께(이탈리아 돌로미테)
산타복장을 하고 파주 손자앞에 깜짝 등장하기도
“가족끼리 연주는 하는가?” 화제를 돌려보았다. 이들은 온 가족이 연주자인 음악가 가족이다. 어머니와 아들은 첼로를, 며느리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가끔.” 자주 만날 수 없어 기회가 많지 않다고 했다. 부인 사비네 씨는 독일 통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지만 한 가지 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며, “외국인 며느리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손님으로 온 나라에 대해 논평하지 않겠다는 노작가에게 지금 머물고 있는 파주에 대해 물었다.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가족이 있으니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그에게 무거운 질문만 던진 것 같았다. 그의 말처럼 국가가 반드시 개개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면 더욱 더, 서로의 사소한 만남이 반갑고 흥미로운 사건이 되어야 했는데...살짝 미안했다.
파주의 이웃들이 안데르트와 유럽여행도 함께했다고 한다. 또 다른 재밌는 에피소드. 한 번은 그가 손자들에게 깜짝 선물을 하려고 산타 옷을 입고 파주 아들집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맞춰 연락도 없이 날아왔다는데,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안데르트 씨가 버티고 서 있더라는 것이다. 먼 유럽에서 찾아왔으니 산타할아버지가 분명하다. 안데르트의 유쾌한 인성이 보인다.
▲ 통일촌 장단콩 두부집 앞에서 기념 사진
가족들은 존재 자체로 경계를 넘어서있다.
냉전시대 베를린 장벽 동쪽에서 ‘첨예한 경계’를 살았던 노작가가 30년을 넘어 남과 북의 경계를 찾았다. 첨예한 두 경계는 유럽과 동아시아라는 거리, 또 30년이라는 시간에 가려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밑바닥 어딘가에서 작용하고 있을 테지만 일상은 언제나 그렇듯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일부러 찾으려 했을 뿐 경계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동서독의 경계, 남북한의 경계가 무슨 소용인가. 이들은 가족으로 살고 있다. 더 이상 질문은 필요치 않다. 안데르트 씨와 가족들은 존재 자체로 경계를 넘어서 있다. 삶이 답이 되고 있다. 경계의 도시 파주를 사는 또 하나의 얼굴이 여기 있다.
저술가 이재석
#130호
▲ 해마루촌 마을회관 앞에서 '파주에서' 신문을 보는 안데르트씨 부부와 아들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